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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야기

부산 전쟁의 흔적 1. 임진년의 최전방 동래를 가다.

시민 교육원 나락 한알에서 하는 역사모임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부산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통상 부산은 후방이고 전쟁에 대한 피해나 영향이 적을것 같지만 부산 만치 전쟁의 최전방에 섰던 곳도 많치 않타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산이라는 도시의 발전의 기현성과 도시의 희생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1. 동래부 동헌

 

동래 읍성안의 동래 동헌의 모형도

 

동래부동헌(부산시 유형문화재 제 1호, 조선 후기, 동래 시장 앞)

동헌은 다른 말로 아헌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관찰사, 수령 등이 업무를 처리하는 곳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다시 세워졌다. 이때의 동래부동헌이란 충신당과 그 부속건물들을 말한다. 충신당은 1636년(인조14) 동래부사 정량필이 처음 세웠고,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이 忠信堂 이란 현판을 붙인 후로 조선말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동헌중심 건물로 사용되었다. 충신당의 동·서쪽에 연심당(지금의 동익랑)·독경당, 남쪽에 바깥 대문인 독진대아문 , 서남쪽에 망미루 등이 있었다 동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동래군청 건물로, 1973년부터는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다가 1978년 부산시에서 보수하였다. 동익랑은 1990년 보수하였고, 1996년에는  충신당 안에 옛 동래부동헌의 축소 모형을 설치하였다.

원래 충신당은 양옆에 방, 가운데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동래군청 등으로 사용되면서 현재와 같이 모두 마루로 되었다. 현재 현관은 독립운동가 한형석의 글씨로 만들었다. 연심당은 원위치보다 충신당 쪽으로 너무 가깝게 옮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경내에는 동래부사 이원진(1644~45년 재임) 등의 청덕선정비야 4기가 옮겨져 있다.  이밖에도 독경당과 회랑, 염문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활용되던 독진대아문과 문루인 양미루는  1930년경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현재의 금강공원 안팎으로 옮겨졌다.

동래부동현은 군청사로 사용되면서 벽면, 마루 등이 교체·보수되어 원래 모습을 많이 잃고 있으나, 부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유일한 동헌이다.

 

 

사실 부산의 구도심이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의 도시라면

파괴되었지만 동래 읍성이야 말로 부산의 원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래의 옛지도 ...동헌의 겉모습만아니라 안을 찬찬히 살펴보년 우리가 알아야 할 부산의 근대를 이야기 해 주는듯 합니다.

 

비오는 날시임에도 동래 동헌에 모여 강의를 들으시는 참가자분들

 

동헌안의 여러 현판들

역사의 이야기를 간직한채 제자리를  찿기위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 할듯

동래 예전 읍성의 형태만이라도 제대로 복원하면 부산의 컨텐츠로썬느 엄청난 효과가 클듯 합니다.

 

 

 

동래 과거를 보려 주는 여러 사진들  지금 보다는 좀 여유러운 느낌의 모습입니다.

 

전쟁으로 확장되어버린 도시가 다시 도시화와 산업화로 그리고 상업화로 변해가는 부산의 모습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옛 동헌의 크기와 규모 그리고 일제가 훼손한 동헌을 생각게 합니다.

 

   동익랑                                                                                                                                          충신당

 

2. 송공당

송공송공단 (부산시 기념물 제 11호, 조선 후기, 단비, 동래 시장뒤)

송공단은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해마다 봄과 가을에만 제사지내던 송공사에서 송상현 공이 돌아가신 음력 4월 l5일에도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뒷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전망제단을 만들어 매년 음력 4월 15일 송상현, 정발,조영규, 노개방,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데서 비롯된다.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진왜란 때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 터에 송공단을 설치하여 농주산 전망제단의 선열을 옮겨 모셨다.

처음에는 동·서·남·북의 4 단으로 만들어 음력 4월 l5일 제사를 지냈다. 1766년(영조42)에는  다대진첨사 윤홍신 등을 추가로 모셨다가 그 뒤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이는 송공단에, 부산 진성에서 순절한 사람은 좌천동의 정공단에, 다대진성에서 순절한 이는 다대동의 윤공단에 각각 따로 모심에 따라 1767년경에 단을 고쳤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송공단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1971년 외삼문, 대문 각 1동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내삼문을 세웠고, 1972년 부산시 기념물로서 지정되었다.

동래구에서는 2005년 11월 충렬사지의 기록에 따라 윤공단·정공단이 만들어진 뒤 동래읍성전투 때 순절하였거나 공을 세운 분들만을 송공단에 모실 때의 모습으로 바로잡았다. 정단에는 송상현을, 동 1단에는 조영규 ·노개방을, 서1단에는 문덕겸·양조한·조봉수·김희수를, 서 2단에는 신여로·송백·김상을, 서3단에는 동시사난민인을, 별1단에는 금섬·의녀 2명을, 별 2단에는 동시사난부녀를 각각 모시게 되었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4월 l5일 동래부에서 음식 등을 마련하고, 부사 이하 모든 관원이 제사를 지냈다. 여성들은 동래부의 관청 기생이, 노비 철수.매동은  관청 노비가 각각 맡아 제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지냈고, 최근에는 음력 4월 l5일에는 동래기영회에서, 음력 9월 9일에는 동래 시장 번영회에서 각각 제사 대신 추념식을 올린다.

 

 

 

 

 

 

3. 동래부 객사터

 

 

임금의 전폐를 모시고 중앙관원들이 유숙과 외부 손님들을 영접하던 동래 읍성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았던 건물입니다.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 있는 객사터 ...... ..옛 모습으로 복원을 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합니다.

 

4.지하철 수안역   "동래 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지하철 4호선 수안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임진왜란의 참혹한과 동래 읍성의 옛 모습을 엿 볼수 있습니다.

 

2005-2008  동래교차로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장에서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해자가 발견됨에 따라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곳해자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수많은 사람 뼈와 갑옷·칼·창·활·화살 등 여러 종류의 무기류가 함께 출토되어 동래읍성 전투의 참혹한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좁은 해자에서 발견된 칼에 베이거나 머리뼈에 구멍이 난 인골 등은 동래읍성 전투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에 2011년 1월 28일 임진왜란 역사의 현장인 수안역에 임진왜란의 참혹함과 선조들의 희생을 불사한 항쟁을 기리는 『동계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의 문을 열었다.

임진왜란 때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싸운 동래읍성 전투는 조선의 민심을 크게 감동시켜 위급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전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들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동래읍성의 모습

읍성은 보통 때는 행정을 보는 관청과 사람들을 보호하고, 전쟁 등이 있을 때는 적과 싸우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지방행정구역마다 하나씩 쌓아졌다. 동래읍성은 동래의 관청 건물 등을 에워싸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원래 망미동 부산지방병무청 일원에 있다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1387년(고려 우왕13) 원수 박위가 현재의 동래 시장과 그 주변에 읍성을 다시 쌓았는데, 발굴 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1446년 (세종 28년)과 1452년 (단종 즉위년)에 고쳐져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다고 1731년(영조7) 동래부사 정언섭에 의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이 감안되어 이전보다 훨씬 크게 쌓아졌다. 이성은 충렬사 뒤 망월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 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중심지의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평산성 형식으로 된 대표적인 읍성이었다. 이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은 읍성의 원형이다. 성의 둘레는 약 3.8km 였고, 4 대문과 암문이 있었으며, 성문 위에는 지희루(동문), 심성루(서문), 무우루(남문), 은일루(암문)라는 문루를 두었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 )을 두고,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이 있는 이중 구조였다. 다른 문에는 옹성을 만들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 시구 개정 등으로 평지의 성은 대부분 철거되고, 산지에만 남게 되었다. 지금 동래읍성지에는 북문과 인생문, 동·서·북장대, 성 벽 901m등이 복원되어 있다.
2007년 3월 북문 안쪽에 문을 연 동래읍성역사관에는 1872년경의 동래읍성을 줄여 만든 모형, 동래읍성 소개 동영상 자료 및 모니터, 읍성의 역사와 모양·쌓는 방법, 동래부사 송상현과 같은 인물, 읍성 안에 있던 옛 건물 등 여러 가지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성의 가치는 산지성과 평지성을 쌓는 기술을 조화시켜 만든 대표적인 읍성이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한 충절의 장소 입니다.

 

 

 

 

당시의 갑옷과 무기들 

 

 

당시 의 칼과 투구 그리고 화살과 활

 

 

해자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의 참혹함이 보입니다.

 

임진왜란의 동래 읍성

 

1592년(선조25)고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의 길을 비켜달라며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휘하는 제 1군 l8,700여명을 부산 앞바다로 보내 침략하였다. 당시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수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줄임말) 박홍은 부산 앞바다 적니 나타나자 도망갔다. 동래의 육군 군사권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병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줄임말, 지급의 육군 향토사단장과 비슷함) 이각도 일본군의 침입 소식을 전해 듣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동래읍성으로 와서 휘하 장수에게 적의 상황을 살펴서 보고하게 한 결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당할 수 없다’고 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기들은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북문 밖으로 도망쳤다. 경상감사(지금의 경상도지사) 김수도 진주에서 음게로 오는 도중에 적이 접근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부산진성을 빼앗은 일본군은 4월 14일 오후에 동래읍성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동래경찰서 남쪽에 진을 치고 100여명의 군사를 보내 동래읍성 남문 앞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쓴 나무판자를 꽂았다. 그러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쓴 나무판자를 적에게 던져 끝까지 싸울 의지를 보이자, 일본군은 날이 저물기 전에 성을 3겹으로 포위하였다.

 

일본군이 이튼날 아침 조총을 쏘더 전면 공격함에 조선군과 백성들(4,000명 정도)은 힘껏 싸웠으나, 일본군이 동북쪽 산의 성벽을 허물고 들어와 성안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여졌다. 백성들은 맨손, 낮, 지붕 위의 기와 등으로 싸웠지만, 수적으로 너무 부족하여 전세는 시간이 갈수록 아군에게 불리해졌다.  송상현은 문관답게 죽을 각오로 의자에 걸터 앉아 관복을 가져오게하여 갑옷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군 중에는 일찍이 외교 사절로 와서 송 부사의 도움을 받았던 평조익이 라는 자가 있어 그를 피신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송상현은 의자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주변의 l다른 성진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으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워 부모와와 자식의 은정이 가볍습니다. 라는 글을 써서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적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송 부사 주위에 있던 군관 김희수 등도 격투 끝에 죽고, 성 안의 사람들도 대부분 전사하면서 한낮이 되기 전에 성은 빼앗기고 말았다. 송상현을 모시던 금섬도 동헌 담장을 넘어 그를 만나러 가다가 잡혀  3일 동안 적을 꾸짖다가 죽임을 당했다, 뒤에 적의 장수 종의 지 등은 송상현에게 탄복하여 송부사와 금섬을 잘 묻어 주게 하고, 송부사를 죽인 병사를 죽였다고 한다.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동래부사 송상현 (송상현공은 문신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3대가 고시에 합격한 명문집안입니다.)에게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북문 밖으로 도망

동래성을 침입한 왜군에 맞서 주민들이 지붕위의 기왓장을 던지면서 저항하고 농기구등을 들고 싸우는 모습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쓴 나무판자를 꽂았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쓴 나무판자를 적에게 던져 끝까지 싸울 의지를 보이는 모습

 

갑옷위에 관복을 입고 의연한  자세로 

송상현은 의자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주변의 다른 성진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으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워 부모와와 자식의 은정이 가볍습니다.

라는 글을 써서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적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성의 정면공격에서 송상현 부사와 관군 주민들의 저항이 심하자. 일본군이 동북쪽 산의 성벽을 허물고 성안에 진입하는 왜군들

 

 

 

읍성의 남문터 비석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의 참혹함은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의 [동래맹하유감] 과  일본측 자료인 『요시노일기」에 의하면, 중과부적으로 인한 도륙의 현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살당했다고 한다.

 

동래맹하유감

4월 l5일
평명인데 집집마다 곡을 하네.
천지가 소슬하게 변하였고
처량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도다.
놀랍고 해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노라.
곡소리가 어찌 그렇게 처참한가?
임진년에 해적들이 들어닥칠 때
이 날에 성이 함락되었다 하네,
오직 그때 송부사께서
굳게 벽을 치고 충절을 지켰는데,
닫힌 문으로 몰아 성으로 들어오자
동시에 피바다가 되었으니
몸을 던져 밑바닥에는 주검이 쌓이고
천 명 백 명에 한 둘이 살아남았다네.
이 날을 맞이한 까닭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그 죽음을 곡하는 것이라.

아버지는 혹 그 아들을 곡하고
아들은 혹 그 아버지를 곡하고
할아버지는 혹 그 손자를 곡하고
손자는 혹 그 할아버지를 곡하고
또 어머니가 딸을 곡하는 일도 있고
또 딸이 어머니를 곡하는 일도 있고
또 아내는 남편을 곡하는 일도 있고
또 남편은 아내를 곡하는 일도 있고
형제와 자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이들을 곡하니
얼굴을 찡그리며 듣기를 마치지 못하고
눈물 콧물이 홀연히 턱에 흘러내렸도다.
아전은 바로 앞에 나와 말을 마치고
곡을 하였지만 오히려 슬프지 아니하네.
얼마나 많은가? 시퍼런 칼 아래
가족을 모두 잃어 곡이 없는 사람,

 

「동래맹하유감」에는 ‘송상현 동래부사를 쫓아 성으로 들어온 백성들이 피바다를 이루고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 천명 백 명에 한두 명이 살아남았을 뿐이며, 부모·부부·형제 사이에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이날(동래읍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고 통곡한다고 했다. 시퍼런 칼 아래 그 가족을 모두 잃어 곡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산지역 임진왜란 관련 자료를 거의 집대성하여 편찬된 『충렬사지」 권 4에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순절한 당시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정로가  아버지의 유혜를 찾으러 동래부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뼈를 거둘 수 없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래향교

 

마지막으로 동래 향교에서 마무리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비가 와서 동래읍성의 모습이 남아 있는 산성쪽으로 가보지 못한  아쉼움을 뒤로 하고

임진년의 최전방 부산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오늘이 였습니다.

 

 

 

 

 

 동래부 관내 기타 임진왜란 전투

i) 부산진전투(1592.4. 13~4.14 오전)

o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에서 조선이 왜군과 싸운 전투
o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고니시유키나가  휘하의 제1군 1만8700여 왜군이 병선 700여척을  이끌고 부산포에 침입
o 부산진첨사 정발은  전선 3척을 이끌고 출포하였으나  적어 이미 절영도(지금의 영도) 내·외양에 들어와 있어 정발은 일진일퇴하면서 부산 진정으로 돌아와 군인을 소집하고, 진투 태세 준비
o 다음날 이른 아침 적군은 우암 쪽에서 상륙한 뒤, 세 방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공격함에 대항하여 성안의 남녀노소가 모두 분전하였으나, 첨사 이하 대부분이 전사하고 성은 함락

 

2) 다대진전투 (1592.4.14. -- 4.15.)
o부산 진성을 함락시킨 고니시유키나가군 일부는 기세를 타고 인접 지역의 서평포와 다대포진을 공격하였으나, 두진영의 전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불분명(이는 서평포와 다대포가 모두 지금의 부산 영역이었지만 부산포보다 군사적 지위가 낮았고, 외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으로  추정)
o l952년 4월 14일 부산 진성을 함락시킨 적군의 다수 병력은 동래로 향하고, 나머지 소수의
병력은 다대포를 포위하였으나, 조선군의 저항으로 실패
o l5일 다시 적의 공격을 받아 다대포성은 함락되었으며, 첨사 윤흥신과 동생인 홍제 등 군·관.민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
o일본군들은 상륙 이후 경상도 해안 지역의 요충인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점령함으로써 조선
군의 해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교두보 확보

 

3)부산포해전(1592.9.01.)
o: 1592년 (선조 25) 9월 1일 이순신() 이 지위하는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왜선 100여
척을 무찌른 해전
 o 이순신 등은 임진왜란으로 일본 수군의 소굴이 된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하여 8월 24일 전
라 좌·우도 수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하자 왜선은 선창 동편에서 470여 척이 대응 태세
o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 척의 조선 수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적선 100여 척을 불태우고 부수었는데, 이 전투에서 우리 수군의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명, 부상자 25명만 발생

 

4)수영 25의용들의 전투
o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이곳에 침입한 왜군은 7년 동안이나 이곳에 주둔하며 약탈과 살육을 감행하자 이에 맞서 이곳 수군·성민 25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과 싸우기로 결의하고,7년 동안 유격전으로 적에 대항
o 1609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지방민들의 신청에 따라 25인의 사적을 조사.기록하고, 그 문에  의용(義勇) 2자를 써 붙인데서 시작
o 순조 때의 동래부사 오한원은 그 후손에게 역을 면제시켜 주고, 글을 지어 포장
o1853년(철종 4)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워 의용단 이라 이름하고 재실을 지은 이래 매년 3월과 9월의 정일에 제사 봉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