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흔적

운문사 그 아름다움에대하여

꾹작가 2011. 11. 8. 15:47

10월 21일 22일 100인 닷컴과 감클러스터 사업단이 주최한 청도 팸 투어에 다녀왔습니다. 

운문사의 은행이 황금으로 물들러있습니다.


 

운문사 ........홈페이지에서  http://www.unmunsa.or.kr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시원리 호거산에 있음
대한불교 조개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창건
608년 (신라 진흥왕30년)에 원광국사가 제 1중창하셨습니다.
이후 2차 보양 국사 3차  원응국사 중창이 있었습니다.
 

원광국사는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화랑들에게주신분입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부모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 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산아있는것을 죽일때는 가림이 있어야한다

 


가람배치가 특이하네요

운문사에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이,  긴 담장 중간에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는 범종루가 입구입니다.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
500 년의 세월을 딛고 서 있네요. 
높이는 9.4m, 둘레는 3.37m이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고 합니다.. 

운문사 원응국사비와 비각
보물 제316호  고려인종
행서 글씨체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잘 알아보기가 힘듬-접근 금지
탁본이라도 매점에서 팔았으면 합니다.(관련자료 거의 없음 )
아님 정말 고화질의 사진이라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면합니다.  

 



 


극락으로 들어가는 곳
운문사의 창건 설화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나그네의 목을 젖시네요..................

 



가을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대웅보전과 3층석탑
 대웅보전은 보물 835호입니다. 박에서 보는 건물의 모습도 당차게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휠신 더 웅장한 모습을 볼수 이습니다. (법당 안을 촬영하려면 종무소에 허락을 받아야 한답니다.
밖에서 보는 일반적 모습과 달리 안에는 더 웅장하고 한옥에서 볼수 없는 시원한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법당은 안에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봉안해 놓았으니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이라 불러야 옳을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대웅보전’이란 편액이 붙어있다어 운문사는 두 개의 대웅보전을 거느리고 있는 특이한 가람이 되었습니다.
 
운문사 3층석탑  보물 678호  신라시대
동서에 쌍탑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압전
압작이라 안읽고 작압이라 읽는단다. 낙관이 앞에 있는 경우이다.


고려 고종 2년인 1215년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 의 원광조 이야기
진평왕 22년인 22년인 서기 600년에 원광이 신라의 사신 내마제부를 따라 물을 거슬러서 본국으로 돌아오던중 갑자기 바닷속에서 낯모를 사람(海龍,鬼神) 이 나타나 정중하게 예를 표하면서 "원하옵건데 스승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절을 창건하고 진리를 강좌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좋은 과보(果報)를 받게 해주십시오" 라고 소청하므로 이에 원광이 승낙했다.
마침내 원광이 삼기산(三岐山) 에 있는 옛집으로 갔다.
밤중에 그귀신이 와서 문안하기를 "스승님 잘 다녀 오셨습니까" 라고 하기에 "당신의 은덕으로 모든 것이 원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귀신은 "저는 떠나지 않고 스승님을 곁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께서 바다에서 절을 짖기로 약속 했을때의 그용이 지금 함께 왔습니다." 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원광이 "어느곳에 절을 지으면 좋겠는가?" 라고 묻자 "저기 저 운문산(가지산에서 뻗은 지맥) 에 까치들이 쪼은 땅이 있을것이니 그곳이 최길지입니다" 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다음날 원광은 가르쳐 준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석탑이 나왔으며 이후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절을 짓고 절이름을 운문사라 하였다.
이운문사에는 옛날 작갑사(鵲岬寺까치절), 갑사(岬寺) 라고도 불렀는데 삼국유사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 에 나온 이야기이다.
신라시대 이래 청도지방에는 작갑사 등 크고 작은절들이 많았다.
그러나 후삼국의 난리로 가서갑(嘉西岬) 등 다섯갑사가 없어지고 폐허가 뒹굴던 기둥들을 대작갑사(지금의 운문사) 에 모아 두었다.
보양국사(寶陽國師) 가 당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올 때 서해 중간에 이르자 용왕이 그를 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염송 하게 하고 금라가사(金羅袈裟) 한벌을 내리시며 용의 아들 이목을 딸려 보내 보양국사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용이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아들과 함께 본국의 작갑(지금의 가지산)에 들어가 절을 짓고 있으면 수년이 못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보양에 돌아와 이마을에 이르니 한 늙은 스님이 자칭 원광이라 하여 인궤를 안고 나와 전수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보양이 절을 일으키려 북령(지금의 운문령)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오층 황탑이 보였다.
거기서 내려와 둘러본즉 아무것도 없어 다시 올라가 보니 까치들이 떼를 지어 땅을 쫒고 있었다.
용왕이 작갑이라 한말을 생각하고 그 곳에 불사를 일으켜 절을 짓고 작갑사라 불렀다.

                                                                                                  (sungonkim.hihome.com/un1.htm 에서 퍼 옴)





스님이 예불중이십니다.
석조여래좌상  보물317호
사천왕석주 보물318호
다른 절의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납니다.

 


가끔 등장하는 표지판들
여기가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공간이자 수련하는 도량이다보닌 곳곳에,,,,,,

그래도 살짝 열린 문사이로

굴뚝인것 같은데 ....들어 갈수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