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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야기

부산의 전쟁의 흔적2- 감천문화마을 그속의 공공예술과 도시 재생의 현장

시민 교육원 '나락한알'에서 주최하는 "기억에 담긴 부산속의 길 튜어"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튜어는 "한국전쟁을 기억한다"의 부재로 감천문화마을 다녀 왔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그 속의 이야기들 그리고 다시금 활력을  찿고자 노력하는 도시재생과 공공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현장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기는 입구 감정초등학교 앞 입니다.



고 최민식 선생님 사진 입니다.  초기 감천 문화마을 의 모습 


현재의 모습  


먼저 여기보다 아래쪽  김천 1동의 역사를 먼저이야기 하면 


감천 1동은 이미 선사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역사가 오랜 마을이라고 합니다.  
6기의 지석묘( 支石墓 )가  발견된 곳으로 보아 신역 ( 神域 )으로 추측됨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인데 여기서 "감"은 "검"에서 유래한다고 해석되며, '검'은 신( 神 )이란 뜻을 가짐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나 청자 편이 출토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감천만을 출입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하는 수문(守門  )과 공청(公廳)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주둔지이기도 했고, 1962년 부산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용두섬이란 작은 성을 포함하여 큰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고 몽돌 자갈밭을 가진 조용하고 깨끗한 해변을 가졌다고 전해짐
 5대에 걸쳐 살았던 토박이 김용조씨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의 감천 2동에 해당하는 '안골샘' 혹은 

'안꼴새'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감 내포"라고 불리던 곳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에 100 가구가 조금 안되는 마을이 60년대의 개발 이전까지 자리했다고 합 

백영재 동명대 교수 /미학




  예쁘게 채색된 건물들- 마을의 활력있어 보입니다.


하늘마루으로 가는길    ----전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먼저                              



주민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입니다.




                                                                  하늘마루 가는길에 있는 갤러리 

테라스가있는 풍경     

 

 

                                                 어둠의 집                    

 하늘 마루아래쪽은 게스트 하우스로 손님들의 안내 그리고 문화마을 안내지도를 살수 있습니다.









하늘 마루에서 본 부산의 구도심과 태극도마을 


감천 2동의 역사


감천 2동 태극도 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8도에서 모여든 태극도 교인들에 의해 조성된 마을입니다. 태극도는 증산계의 일파이며  현재는 태극도와 대순진리회로 분파 되었습니다. 

1955년 7월 부산 중구 보수동에 위치하고 있던 태극도본부와 도인들의 집단촌이 시당국의 철거 계획으로  현재의 감천 2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이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모여든  피난민으로  

피난민들에 의해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된 마을입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척박한 민족현대사의 한단면과 혼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골목길이 가로 골목길이다. 일반 산동네은 세로 골목인데 반하여  감천 2동은 가로 구조의 가옥구조이다. 


도주 조철제는 전체 지역을 9개 구역으로 나누어, 집과 집들은 서로 통하고 경사면을 이용하여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 질서 정연한 마을 조성 계획을 실행, 부산 특유의 산복도로를 낀 산동네에 속하면서도, 초기  태극도들에 의해 구획된 마을의 질서정연한 구조가 사통팔달의 정감어린 골목긺들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님

감천 2동 피난민 시대의 마을의 형태가 생성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전후의 판잣집들이 사라호 태풍의 영향으로 60년대에 슬레이트지붕의  집으로 바꾸고 이어 80년대에는 슬라브 집으로 그 개량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지만, 마을 특유의 가로 구조와 골목 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기차집이란 별명 얻은  열을 서서 지어서 건축 골목이 남아 있다.

기차집 한편으로는 낭만 적이지만 항편으로는 당시 피난민들의 힘겨웠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주의사항  누구에게는 볼거리이지만 누구에게는 삶이 현장입니다. 

레고마을이라는 별명이 있듯이 참으로 다체로운 색감을 볼수 있다. 

자신의 집은 자신이 도색한다고 하니 마을 생각하는 주민들의 소중함을 알것 같다.

 

감내 어울리터                                                                                           

 

1층은 공방으로 /2층은 화랑 / 3층은 서당 /4층은 사랑방/옥상은 전망대

기존의 목욕탕 건물이였던 것을 리모델링하여 어울림터를 만들어 냈에요.

 그리고 기존의 모습과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것이 좋아 보입니다.


 

기존의 목욕탕 가구를 그대로 살려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네요


골목길을 따라                                                             


어디서나 보이는 안내 물고기들ㅋ 이것도 주거환경 개선사업등을 하고 남은 나무를 재활용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 합니다.



피난민의 고단함과 함께 오른던 그 옛날의 그자리 그 골목의 경사길




휴~~~ 꼭 한번은 쉬어서 돌아 보아야 할 것 같은 


피난민의 넉넉지 못한 여건과 환경이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소박한여유로움을 이어주는 골목


                               이웃집의 담이 나의 길이 되고 ,집뒤뜰이 나의 앞마당이 되는 삶을 공유하는 공간 



길에는 삶이 있고 활기가 있다. 이동만을 위한 여느 길과는 다른 도가른 삶의 현장이다. 



평화의 집         ......그리고 공공 미술                                     

 

공공미술과 도심재생

개발정책의 한계와 사회복지에 대한 논의 속에서 탄생한것이다.
문화정책을 기반으로 한 창조적 도시재생의 방법이 공공미술이다. 

재생의 개념

renaissance, rebirth, resuscitation, revival, revitalization, reproduction, recycling, renair, renewal, regeneration 
도심 재생이란, 과거와 단절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설정 하거나 추구하는 혁신의 방식과 달리, 정신과 물질 양면에서 어느도시나 마을이 갖는 역사성이나 문화를 재조명하고 보존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정책적 실행의 개념이다.

따라서 도시재생 혹은 마을 만들기에는 주택 개보수, 도로 개설, 위생,녹지,커뮤니티 시설 건립 등과 같은 물질적 재생사업외에 재생도 중요한 항목이라 볼수 있다. 도시재생은 문화적 재생이 중요하다. 


공공미술이야기 

현재는 21세기에 이미 들었지만 동시대라 할 수 있는 지난 20세기에  문화의 중심지는 유럽이라고 할수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물질문명에서의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고, 정신문화적 측면에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일 것이다.

이 양대 계기를 통해  산업화화 함께 근대 예술사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예술의 역사에서 인상파라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이 그 것이다. 인상파의 등장으로 과거의 아카데미적인 전통이 더 이상 계승되지 아니하게 된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바로크 미술 등......)

미술에서 재현 즉 사진기가 없던시절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사물을 재현하면서 표현 하던 방식- 회화에 담아서 보존하던  화화의 기능적 방식이-  사진기의 등장으로  더이상 재현의 영역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사진기의 발명으로 재현 예술의 영역이 사진으로 넘어갑니다.

사진의 등장으로 더이상 재현에 대한 필요성의 상실한 미술 .................


인상파미술은 미적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미적 주관주의 입장으로 변화하기 시작 


예술의 미는 객관성의미학과 주관적 미학 두개로 분류됩니다.

세잔을 통하여 형식주의 미학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내용주의 미학은 리얼리즘이 대표적인데 문제의 상황을 그대로 노출 표현 시키는 예술이다. 이것은 격동의 세월에서 바로 구체적인 답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격동의 격정의 세월에 통용 되는 예술이다. 시대의 증인, 증언적인 작품 이며 메세지 전달의 중점적인 예술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이 안정되면 격식을 차리듯 

삶의 자리가 안정되었을때 나타는 미학이 형식주의 미학이다.

세잔의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20세기 미술은 어떻게 그릴것이가?

HOW 방법적 문제 .......나는 이렇게 본다.나의 관점은 이렇하다.

형식은 방법이다.  

 

형식주의 미적 주관주의의 긍정적인 면은 

너무나도  동시대 예술 미술 문화가 풍성해졌다. 작가마다, 개별적인 시각, 세계관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예술문화가 형성되었다. 대단한 보물섬이다. 


단점은  주관성 때문에 예술이 어려워 진 것이다.

추상미술은 굉장히 당혹스럽고 어렵다. 난해해지고  에디뜨 주의로 흐르고  예술가와 감상대중의 격절- 거리가 생긴다. 

폭 넓게 향유되지 못하고 자기만의 문화가 발생하는 단점이 생긴다. 

 

여기서 공공 미술이 대두 됩니다.

관객과 작가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 주면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는  


마을 재생사업에서 공공성을 중심에 두는 공공미술은 정신, 물질 양면에서 어떤 도시나 마을이 갖는 역사성, 문화성을 재조명하며 보존하면서 새로은 활력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도시재생은 물질적 재생인 주거 환경 개선사업-주택의 개보수, 위생, 마을 이프라의 건설 등-과 더블어 

문화적 재생 사업이다.

 


평화의집

- 그릇방 : 모든것을 담을 수 있는  

평화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수 없다. 그러나 "평화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낼수 있는  그릇이다." 

- 달의방  : 모든것을 공평하게/ 아들과 함게 / 명상의 얼굴 

달빛은 세상 모든것에 공평하게 빛을 준다. 빈부격차와 인종이나 종교 등에 상관없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빛을 준다. 

평화는 우리 인류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평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인간이 가장 평온할때가 밥먹을대가 아닐까 ㅋ

인간이 싸우는  이유도 남의 밥그릇을 탐해서 그런것은 아닌지 .........

"평화 : 다른 생각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작가의 말이 가슴을 져미네 


달의방


흔적 영역의 확장이 전쟁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처럼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만하네



세월의 작품과 자연의 작품 그리고 작가의 작품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축적의 작품이 있네요

                                           어린왕자는 무엇을 보고있을가? 여우는 또 무엇을 보고 있을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감천 2동은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종전 60년 그 앞에 일제 강점기가 있었고 분단으로 내몰리게 되는 자주적이지 못한 상황이 지속 되고있다. 

분단의 상황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통일을 이루기 힘들어 져가는 정새까지 겹쳐서 나타나는 현실에 살고 있다.

앞전 정권의 노력이 없어져 가고, 미래의 주역이 될 젊은 분들의 상당수는 통일 비용을 걱정하고 있다. 

통일 비용.............그래 서독을 보면 토일 하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이겨낸 현재의  독일의 모습은 .......

아마도 우리도 만만치 않은 비용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기간 통일이 늦어지면서 통일의 비용의 지출은 없었을지 몰라도 분단의 비용은 계속적으로 지출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비용보다 분단 비용이 크다고 본다. 


감천 문화마을에서 다시금 통일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