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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야기

민주 공원과 중앙공원-1 조각공원 이야기


6월하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달이다.

우리나라 동족상잔의 비극인 전쟁이 발발한 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제도적인 민주주의 좆적을 남겼던  6월 항쟁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시작이였던 615 공동선언도 있었다.  아마 6월은 현재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많은 일들의 시작이 되었던 달인것 같다.

이런 6월을 대표 할만한곳이 부산에 어디있을까? 

한 곳의 두가지 형태의 공간이 존재하고 어지보면 현재의 우리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 아마 그곳이 바로 민주공원과 중앙공원일것이다. 

두공원의 모습은 세로의 권위를 나타내는 중앙공원과 수평의 편안힘을 나타내는 민주공원 그리고 내용적인 성격도 충절의 이야기 하는 중앙공원의 충혼탑과 민주주의를 밝히는 민주공원의 횟불 서로 상반도 듯한 보습이나 현 사회의 우리의 모습인것 같기도 한곳이다.  


중앙공원은 38번 43번 버스를 타시면 공원바로 앞에서 하차 하시면 되고 190번 135번 70번 버스의 경우는 5분정도 걸어 올라 오셔야 합니다. 

일단 전체는 중앙공원안에 민주공원이 별도로 조성 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중앙공원보다는 민주공원이 사람들이 더 많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중앙공원은 예전의 대신공원까지 흡수하며 정확히 위치를 말하기 모호하지만  민주 공원의 위치는 사람들이 정확히 인식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중앙공원안에 민주공원과 부산광복 기념관, 부산 시립중앙도서관, 대한해협 전승비, 조각공원, 시민광장, 그리고 부산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충혼탑 등이 있습니다. 



조각공원 안에 세워진 625 호국 유공자 기념비

이 공원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조각공원안에 있는 독립 투사들의 기념비 

독립투사 최천택 선생

"독립투사 최천택선생은 1896년 부산 좌천동에서 출생하여 일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1962년에 세상을 떠난 보기 듬눈 애국 투사다." (비문)

참고로 선생님 얼굴이 다소 비장하게 보이는 이유는 (흡사 윤봉길의사의 사진과 같은 포스) 이 얼굴을 찍을 당시 사진을 보면 알수있는데, 이사진을  같이 찍은 분이 바로 박재혁  의사이다. 다음날 부산경찰서 폭탁투척을 결심한 박재혁 의사는 오히려 편안한 얼굴이 였고 친구를 떠나 보내는 최천택 선생의 얼굴은 친구와의 애틋함이 묻어있는 다소 상기 되어 있는 모습이였다.  


부산에서는 
거의 모든 항일운동에서 활동한 인물이 소천(蘇庭) 최천택(崔天澤)으로 10여 차례나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해방 후에는 민족 자주국가 건설에 앞장섰고 반독재운동도 전개했다.
최천택은 1886년 6월 부산 좌천동에서 최차구(崔此球)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해운대와 가야 등에 상당한 전답이 있어 넉넉했다. 그런 그가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독립투사였던 당숙 최상훈(崔尙勳)과 숙모 변봉금(卞鳳今)의 영향이다. 
최상훈은 1919년 무장투쟁 단체인 북간도의군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10여 년 헌신하다 시베리아 치타에서 일본 밀정에게 암살되었다. 변금봉은 남편의 소식이 끊기자 만주 심양에서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를 한 이다.
최천택은 처음 부산진의 유지들이 경영하던 육영재에서 한문공부를 하다 1908년 개칭된 사립육영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았으며,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현 부산상고)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항일의식을 키웠다.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 금서 '동국역사(東國歷史)'를 학우 박재혁(朴載赫),오택(吳澤) 등과 몰래 윤독하고 등사해 배포하다 10여 일간 처음으로 구속됐다. 이 때부터 그는 부산경찰서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이후 이 소모임은 1913년 구세단(救世團)으로 발전했다. 
구세단은 소정이 중심이 되어 항일투사의 국내 연락과 유사시 항일 비밀결사대로 전환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로 등사판 잡지를 만들어 경남의 청년들에게 보내고,조직의 역량 강화를 위한 수련회를 갖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반 년 만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구속됐는데,이 일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1년 늦게 졸업했다.
1919년 2월에는 김규식의 수행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가기 위해 상해에 갔던 구세단의 동지 김인태로부터 연락을 받고 일본에 건너간 소정은 3월에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이니 구세단의 조직을 강화하여 궐기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고 귀국한다. 이후 장건상(張建相)의 조카 장지형(張志亨)에게 시국을 설명하고,자신은 울산 등지의 동지들에게 연락하러 부산을 떠난다. 
때문에 대구에서 3·1운동을 맞은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 3·1운동의 경과를 설명 듣고 부산에 다시 내려온다. 
이때 부산공립상업학교의 후배 백용수(白龍水)와 함께 서울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뿌리면서 3·1운동을 재선동했다.
아마도 최천택이 널리 알려진 사건은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일 것이다. 부산공립상업학교 동기동창 오탁과 삼형제 결의를 맺은 박재혁이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을 넘겨받고 부산에 들어와 폭탄 투척 하루 전까지 소정과 지내다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하지만 박재혁이 끝까지 단독범이라고 우겨 소정은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1921년에는 일본에 건너가기 위해 부산에 체류하던 유랑노동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 등과 주택구제 부산시민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에는 김국태(金局泰)와 함께 시대일보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운동을 전개했는데,친일종교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이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촉발시켜 결국 무산시켰다.
한편 3·1운동 이후 국내의 민족운동이 청년회 조직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으로 바뀌자 부산에서도 1920년 말 7곳의 부산청년회가 조직되었다. 
부산청년회는 부산지역운동의 중심체였는데,그는 산하단체 중 핵심단체였던 부산진구락부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본가들이 경제공황으로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청년회운동도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어 1925년경에는 휴면 상태였다.
그러자 이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한다.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세력은 서울파와 화요파였는데,1924년 조선청년동맹이 결성되어 지방대회를 추진하자 경남에도 두 파가 영향력을 미쳤다. 
이 때 부산에서는 서울파의 부산청년연맹과 화요파의 부산부청년연맹이 각각 병립했으며 소정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7년 부산청년동맹으로 통합된 이후 그는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공간을 신간회로 옮겼다. 이때 그는 불운하게도 관제 청년회 간부 응징사건으로 검거되어 오른 눈을 잃는다.
때마침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반제통일전선체로서 1927년 신간회를 결성하자 7월에 신간회 부산지회도 결성되었다. 
김국태가 회장,소정은 상무간사로서 활동했다. 1928년에는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사건을 규탄하기도 했다.
1929년에는 신간회 부산지회 회장이 되어 지회의 일을 관장했는데,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부산 제2상업학교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했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부산지회의 회보발간,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문제 등을 추진했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는 중일전쟁 이후 폭압정치를 강화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적 전환을 강요했다. 소정은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하고,다음에 미국과 전쟁을 하면 우리나라도 독립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그는 1941년 장건상 해외탈출사건과 소설가 김동리의 형인 김범보의 해인사사건에 연루돼 검거됐다.
1945년 8월 9일부터 예비검속을 당해 있다 해방을 맞은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기획부장으로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으로 좌우대립이 전개되자 소정은 김철수(金喆壽)와 함께 반탁의 입장에 섰으며,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그는 정치노선에 대해 고민하면서 좌우익의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정치에서 물러난다.
1948년에는 일제강점기에 신간회를 통해 알고 있던 강재은(姜在殷)과 함께 민주중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사회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1950년 5월 2대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장건상의 선거사무장을 맡아 이승만이 지지한 김국태를 낙선시키고 장건상을 당선시켰다. 
이 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좌익으로 감시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경남 민전위원장 김동산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때 친구 김동산을 잃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혁신계가 활력을 되찾지만 곧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혁신동지총동맹으로 분열됐다. 
그는 장건상과 함께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7·29 총선 때 부산 동구 을에 출마했으나,혁신계의 난립으로 민주당 이종린(李鍾麟)에게 패배했다. 
낙선의 좌절감에 빠져 있던 소정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 개월간 복역하고 풀려났다. 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비록 그에게서 혁명가다운 이념이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해도 그는 비타협적 민족주의라는 확고한 정치철학을 갖고서 올곧게 산 인물이었다. 새삼 그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일본만이 아닌 모든 외세가 물러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라고 했던 언급을 되새겨 봄 직하다. 

원문 부산일보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30903000543


소해 장건상 선생 

" 소해 장건상 (1882~1974)선생은 경상북도 칠곡 출생으로 1916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동제사에 가입,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의정원으로 활동, 동년 11월 의열단이 창립 될때 총장이 되어 기밀부의 요직을 맡아 국내 무기반입 등을 지휘하였으며,1924년에는 애한 미국 입시정부 외교총장으로써 의열단 이종암 등의 입국을 지원하고 1926년 잡지 [혁명]을 북경에서 발간하는 등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927년 의렬단 제 3기 간부 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당원으로 활동하며,1928년 의열단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 반입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상하이 일본 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되어 1941년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석방되었고 1945년 독립운동선상의 좌우 합작과 대동단결을 위해 임정대표로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엿다. 장건상 선생의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일깨우기 위해 1991년 10월 동상을 건립하였다 "


소해 장건상 선생은 해방후 이승만 독재와도 싸우신 분입니다. 




민주 공원 가기전에 잠시 공원 입구에 있는 4.19 기념비


부산을 상징하는 배의 닷모양을 담은듯합니다.

이 기념탑은 월래 용두산 공원에 있었으나 민주공원이 조성되고나서 이곳으로 옯겨 온것입니다.

역광의 하늘을 향해 뻗어져 오른 모습이 4.19 혁명당시의 시민들의 기상인것 같습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모글


이제 민주공원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