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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비석 박살낸 친일 해인사 주지 | |||||||||||||||||||
대한민국은 친일공화국이다-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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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19명의 서훈을 취소했는데 그 가운데 이종욱(李鍾郁)이란 이름이 들어 있다. 이종욱은 월정사 주지로 있으면서 3·1의거에도 참여했던 자이나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비행기 헌납 모금활동과 일본 승전 법회를 열기도 했다. 친일파 가운데는 승려도 적지 않은데 어떤 자는 한국 불교를 왜식 불교에 팔아먹기도 하였고, 또 어떤 자는 쇠붙이 공출 때 사찰의 범종을 떼어내 일제에 바치기도 했다. 경남 합천의 명찰 해인사의 일주문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를 가면 다리(홍제교)가 하나 나타난다. 그 다리를 건너가면 오른쪽 편에 부도밭이 나타나고 바로 뒤에 암자 하나가 나타나는 데 바로 홍제암(弘濟庵)이다. 홍제암은 ‘임진왜란’ 때 산중의 승려들을 규합해 왜적과 맞서 싸웠던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입적한 곳이다. 광해군은 대사가 입적하자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영정을 모신 영자전에는 ‘홍제암(弘濟庵)’이라는 편액을 내려 그의 호국정신을 기렸다. 대사가 입적한 지 2년 뒤 홍제암 오른편 부도밭에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보물 제1301호)를 세웠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썼다. 허균은 비문에서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유서 깊은 사명대사의 석장비는 한가운데가 열십자(十) 모양으로 네 동강이 났던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다. 현재 해인사에 있는 석장비는 일제말기인 1943년에 네 조각으로 쪼개졌던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복원한 것이다. 대체 누가, 무슨 연유로 호국영령인 사명대사의 비석을 이처럼 훼손했을까?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있던 승려 변설호(卞雪醐, 창씨명 星下榮次)였다. 그는 출세를 위해 동료 승려들을 밀고하는가 하면 일경에 아부하기 위해 사명대사의 비석을 네 조각을 내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변설호는 1888년 5월 해인사가 소재한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금강산 유점사 강주(講主)로 있다가 1935년 9월 유점사 경성포교소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서울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직후부터 그는 친일로 들어섰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그는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에 가서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를 지내주었으며, 또 일본군 출정부대를 전송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에는 유점사 경성포교소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냈으며, 신도들로부터 국방헌금 50원을 거두어 부대에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그해 3월 그는 돌연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해인사 주지로 선출됐다. 그런데 해인사는 1936년 이해 두 번이나 주지를 선출해놓고도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해 주지가 공석이었다. 그 자리를 그가 꿰 찬 데는 앞서 그가 서울에서 행한 각종 친일행각의 공로가 총독부로부터 인정받았음은 불문가지다. 그는 주지로 임명도 받기도 전에 본·말사 승려들을 재촉하여 국방헌금 515원, 위문금 578원, 위문대 200개, 금 1개, 천인침(千人針) 2개 등 현금 1094원과 물품 1305점을 일본군에 바쳤다. 그리고 그 다음달로 그는 주지 취임 인가를 받았다. 그의 친일행각은 급기야 항일 승려를 밀고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 해인사 강원인 법보학원의 강백이자 8대 주지를 역임한 이고경(李古鏡) 스님과 원장 임환경(任幻鏡) 스님이 학승들에게 불교경전 외에 조선역사 등을 가르친 것이 말썽이 돼 합천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흔히 ‘해인사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두 스님을 비롯해 11명의 학승들이 투옥됐는데, 이들을 밀고한 사람이 바로 해인사 주지로 있던 변설호였다.
사명대사 석장비 훼손사건은 그 뒤의 일이다. 그는 당시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게 홍제암에 있는 석장비의 내용이 문제가 있다고 제보했다. 1604년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토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사명대사가 ‘지금 조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바로 당신 목이오’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이 있다. 변설호는 비석 내용 가운데 바로 이 대목을 문제삼아 다케우라 서장에게 “이런 비석을 그냥 세워둬도 되겠느냐?”며 부숴버릴 것을 권유했다. 며칠 뒤 그는 경찰과 석수를 데리고 홍제암으로 가서 석장비를 네 동강 낸 다음 한 조각은 해인사 내 경찰주재소 정문 디딤돌로 사용하고 나머지 조각들은 해인사 구광루와 명월당 앞에 보란 듯이 방치하였다. 해방 이듬해 그는 일제 때의 반민족행위로 ‘승권(僧權) 박탈’는 중징계를 받고 절에서 내쫓겼다. 또 1949년 반민특위 경남지부에 체포돼 그해 9월 25일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75년 그는 대한불교 총화종 초대종정으로 취임했는데 이듬해 89세로 사망했다. 그는 고은의 <만인보>(26권)에도 친일승려로 이름이 등장하는데 대처승인 그는 언론인 모 씨의 장인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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